끝까지 간다.
영화 ‘끝까지 간다’는 평범한 형사에게 생긴 우연한 사고가 점점 꼬이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이 영화가 갑자기 생각난 이유는 안동발 청량리행 막차 KTX에서 목격한 일이 영화제목을 너무 닮아서이다.
안동을 21시 25분에 출발한 열차는 금요일 저녁답게 빈 좌석이 없이 꽉 차 있다. 하지만 밤늦은 열차인지라 기차 내부는 오히려 낮보다 조용했다. 한 시간을 이어온 정적을 깨는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내 앞의 앞 창가 좌석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큰 목소리가 울리고 한 두 마디 더 이야기하더니 벌떡 일어난다.
‘그래도 꼴통은 아니네’.
휴대폰을 들고 일어서는 그를 보고 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창가 측 좌석인지라 그 남자가 밖으로 나가려면 옆 좌석 사람을 넘어가야 한다. 그 남자의 옆자리는 긴 머리를 중간에서 매듭으로 잡아맨 젊은 여성이었다. 휴대폰을 귀에 댄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난 남성은 얼핏 보아 60대 후반이다. 햇볕에 약간 그슬린 얼굴과 튀어나온 광대뼈, 그리고 전화를 받는 톤으로 보아서는 소주 두 병은 쉽게 마시고 나름대로 성깔은 있어 보인다. 그 남성이 그 여자를 발로 껑충 넘어서 서너 걸음 앞에 있는 출입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실내는 다시 정적에 잠겼다. 창문으로 풍경이 스쳐 가는 낮 풍경과는 달리 심야의 KTX는 조용한 독서실을 연상케 한다. 나는 읽고 있던 소설에 다시 눈을 돌린다.
그때 앞의 앞자리에서 조그만, 그러나 분명한 여자의 소리가 들린다.
“조심하셔야죠.”
그러자 잠시 후 남자의 볼멘소리가 퉁명스럽게 터져 나온다.
“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뭘 그걸갖고 그래요.”
나는 읽던 소설책을 덮고 앞의 앞자리를 쳐다본다. 조금 전 밖으로 나갔던 남성이 그 사이에 창가 자리로 돌아와 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다시 젊은 여자의 또렷한 목소리가 계속된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요. 미안하다고 하셔야 하잖아요. 그리고 변상도 하신다고 해야하구요”
말하는 내용으로 보아서는 창가 측 남자가 휴대폰을 들고 그 여자를 건너서 밖으로 나가면서 그 여자 좌석 아래에 연결되어 있던 여자의 전화기 충전 잭의 선을 치고 나가 선이 끊어진 모양이다.
“아, 나 참.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별걸 다….....자, 여기 있어요. 만원, 만원이면 되지요!”
그 남자는 만원이면 변상이 되겠냐고 물어본다기보다는 ‘옛다, 만원이다. 먹고 떨어지쇼!'라는 말투였다. 곧바로 높은 톤의 여자가 되받아쳤다.
“아니, 왜 돈은 던지고 그래요!“
두 사람사이의 다툼내용을 확인한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는 걸 보니, 꼴통이 맞네'
이쯤 되면 두 사람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자리를 지키고 가기는 틀린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가 벌떡 일어나서 여자를 휙 넘어서더니 휘적휘적 문으로 다가섰다. 열차 출입 자동문이 스스로 열리자, 몸을 밖으로 밀어내면서 남자가 소리쳤다.
”아, 내 더러워서.... 씨발“
그리고 열차 유리문이 닫혔다. 조용해진 실내는 묘한 정적에 쌓였다. 굳이 원색적인 육두문자를 그대로 이곳에 표기한 이유는 갈등의 막바지에 던져진, 이제는 다시 보지 않을 사람을 향한 모욕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이 칸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서 나름의 분풀이를 입으로 하고 나간 셈이다. 나는 그 순간 머리가 쭈볏해지는, 다시는 생각하기 싫었던, 오래 전 기억이 떠 올랐다.
미국 유학시절, 노스캐롤리나 지역을 밤늦게 여행 중이었다. 이 지역 고속도로는 악명높아서 주말 밤에는 총기사고도 많이 나는 험한 지역으로 알려졌다. 초행의 밤길이라 고속도로 근처의 도로를 엉금엉금 몰던 때 뒷 차가 바짝 붙어서 빨리 가라고 깜빡이를 켜 댄다. 기분이 안 좋다.
'열 받지 말자, 여기는 위험한 남부 노스캘로리나 고속도로 근처다'
5분여를 바짝 붙어서 신경을 거슬리던 차가 나를 추월해서 왼편으로 빠져나가 고속도로로 들어선다. 나는 다행히 오른 편 시내쪽으로 나가는 길이다. 이제는 다시 안 볼 놈이다. 나를 엿먹이던 놈과 이제는 빠이빠이다. 나는 고속도로로 들어서는 그놈의 차를 향해 나름 분풀이를 했다. 경적을 울려대고 하이빔을 켜댔다. 속이 시원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고속도로를 들어선 그 차가 고속도로 한 가운데 '끼익' 급정거를 했다. 그러더니 쏜 살같이 후진해 오는 것이다. 등으로 찬 기운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경찰서를 찾아야 할 위급상황이다. 급히 시내길로 들어섰다. 그 사이 그 차는 내 뒤를 바짝 따라왔다. 저 건너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주유소가 보인다. 우선 그곳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중간에 신호에 걸리고 말았다. 백미러로 보니 그 차가 서서히 옆 차선으로 다가온다. 차가 멈추었다. 창문이 내려진다. 난 모르는 척, 앞만을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권총을 뺸다면 나는 어떡해야 하나 온갖 상상을 한다. 옆 좌석에 있던 집사람이 나보다 용감했다. 고개를 돌려 그 차 운전수를 본다. 젊은 백인이라고 한다. 그가 내 차 안을 훑어보고 뒤에 잠들어 있는 아이들도 보더니 그대로 차를 돌려 다시 고속도로로 돌아간다고 했다. 수십년전의 일이지만 그 차의 창문이 내려오는 순간의 공포는 지금도 가슴을 서늘케 한다. 그 뒤로 나는 절대로 앞 차에 하이빔을 켜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한번 실수는 넘어갈 수 있지만 두번째는 장담을 못한다.
지금 안동발 KTX에서 그 남자가 열차 출입문을 열고 나가면서 뱉어낸 그 욕설은 내가 미국 고속도로에서 앞차에 켜대던 하이빔과 같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상대니까 '옛다, 이거나 먹고 꺼져라'하고 분노를 배설하는 행위다. 미국 고속도로에서 역주행으로 나를 쫒아온 그 남자는 아주 드문 케이스다. 대부분의 경우는 그대로 상황이 종료된다. 안동발 KTX에서는 어떨까.
‘저 남자가 나가 버렸으니 이제 조용해지겠지,‘라는 생각과 ’아니야, 남자가 뱉어낸 마지막 욕설이 그냥 넘기기에는 좀 그렇네‘라는 상반된 감정이 순간 교차했다. 하지만 앞의 앞자리 여자는 조용했다. ‘그래, 상황이 끝난 모양이네’ 나는 다시 읽던 소설책을 펴 들었다. 하지만, 반 페이지를 채 읽기도 전에, 조용한 실내에 여자 목소리가 출입구 너머에서 들렸다.
”사과하세요!“
여자의 목소리는 출입문 바깥에서 기차 소리 속에 실려 왔다. 기차의 윙윙거리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들리는 그 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확실했다. 내가 잠깐 책을 보는 사이에 혼자있던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으로 나가서 그 남자를 찾아간 것이다. 그리고 남자에게 욕을 한 것에 대해 사과하라는거다. 남자는 ’내가 뭘 잘못했는데 사과를 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용한 실내에서의 말다툼이 아니고 출입문 바깥, 기차와 기차 사이의 공간에서의 다툼은 배경소음 덕분에 소리가 더 잘 들렸다. 배경소음을 이기려고 두 사람 모두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돌연 걱정이 되었다. 바깥에는 다른 사람들이 있기는 한 걸까. 여자와 남자, 단 둘만 있다면 이건 위험한 사태가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아 고개를 출입문 안쪽으로 돌렸다. 두 사람만 있는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다툼을 말리는 소리도 중간중간 섞여 있다. 그때 여자 승무원이 잰걸음으로 뒷편에서 다가오더니 그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의 말다툼은 계속되었다. ‘사과하라’와 ‘난 잘못한 것 없다. 돈도 물어주었는데 왜 난리냐?’가 주요 단어였다. 곧이어 남자 승무원이 무전기를 들고 달려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조용해졌다. 잠시 후,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그 여자가 자리로 돌아왔다.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이제 다툼이 끝난 모양이네. 역시 승무원들이 이런 경우에 대처하는 노하우를 잘 알고 있는 모양이네’ 다툼을 이렇게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기술은 어떤 걸까, 나도 그런 기술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지나가는 두 승무원을 다시 본다.
이 소동 덕분인지 시간은 금방 지나가서 기차는 종착역인 청량리에 들어서고 있었다. 안동에서 밤 9시 넘어 떠나서 밤 12시가 다 되어 청량리에 온 셈이다. 다른 때 같으면 소설책을 반은 읽었을 터인데 오늘은 뜻하지 않은 해프닝으로 반의반도 못 읽은 셈이다. 그러나 소설보다 더 흥미로운 다툼 해결의 묘수를 눈 앞에서 보게 되었으니 아쉬워할 것은 없다.
기차가 속도를 줄이자, 앞의 앞자리에 앉았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종착역이라 사람이 많지 않아 내가 바로 여자 뒤를 따라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래도 험한 꼴 안 보고 끝나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기차 계단을 내려선다.
그때 플랫폼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가 중간에 내린 걸로 생각했는데 종착지가 여자와 같은 청량리였든 모양이다. 먼저 가지 않고 서 있는 걸 보니 ‘미안했다’라고 사과라도 하려고 서 있는 건가 생각이 들었다. 순간 영화의 해피엔딩 장면이 생각났다.
‘그래야지, 금요일 밤인데 기분 좋게 마무리하고 즐겁게 집으로 가야지’
개운한 마음으로 플랫폼에 내려섰다. 그때 굵직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자, 이제 서에 가서 이야기하시지요”
여인을 기다리고 있던 그 남자의 옆으로 정복 차림의 경찰 둘이 다가서서 두 사람을 에워싸듯 데리고 나갔다. 그 뒤를 남자 승무원이 따라갔다. 열차에서 두 사람이 도저히 다툼을 멈추지 않자 승무원이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내 앞의 앞 좌석에 앉았던 남자가 씩씩거리며 보라색 원피스 여자를 보고 외친다.
“무고죄로 고소할 거야”
뒷머리를 단정히 맨 젊은 여자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을 받는다. “끝까지 가 봅시다”
영화 “끝까지 간다”에서 두 형사는 서로에 대한 협박으로 결국 끝까지 극한 대결을 벌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인다. 안동발 KTX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던 두 사람은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라면 반전을 기대하며 끝까지 지켜보겠지만 KTX에서 만난 두 사람의 결말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그 남자는 확실하게 나에게 알려준다. 효과적으로 사과하는 방법은 명확하다. 사소한 실수부터, 시기를 놓치지 말고, 진심으로 사과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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